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코히마 점령과 테니스 코트의 전투 === 그런 와중에 임팔 작전의 최우익을 담당한 제31사단의 임무는 2가지였다. 코히마의 점령과 임팔로의 증원군 저지이다. 이 코히마는 인도 아삼주의 수도 디마푸르과 친스키아 방면에서 오는 도로가 합쳐져 임팔로 향하는 요지이다. 따라서 코히마를 점령하는 것은 임팔로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사토 고토쿠]] 중장이 이끄는 제31사단이 친드윈 강을 건넌 것은 3월 15일이었다. 여기에서 좌익 돌진대인 제31보병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58연대로 구성된 '미야자키 지대'가 병력 4천 명으로 코히마를 향해 본대와 나뉘어 돌진했다. 미야자키 부대가 아라칸 산맥으로 접어들었을 때 미야자키 소장은 병사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발상을 해냈으니 그것이 바로 염불이었다. 인도로 가는 원정길이니 염불을 외며 산을 올라가라는 그의 명령에 일본군은 염불을 외며 아라칸 산맥을 넘었다. 미야자키 부대가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것은 4월 5일이었다. 여기서 휴식한 미야자키 부대는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에서 부근 고지로 철수했다. 이때 미야자키 연대장은 부하들의 총을 몽땅 버리게 한 다음 노획한 영국군 무기를 장비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조치였다. 사실상 아리사카 제식소총의 탄약 보급은 끊긴 상태로 상대가 흘린 보급물자를 주워다 싸우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탄약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D_003483_tennis_court_at_Kohima.jpg]] 이 때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Tennis_Court|테니스 코트의 전투]]가 일어났다. 테니스장 양 끝에 서로 참호를 파고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수류탄 던지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임팔 전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제대로 싸웠다고 할 만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즉 이 외의 전투는 전부 일방적인 학살이나 자멸이었다. 결국 압도적인 [[영국군]]의 화력에 부대는 밀려버렸고, 공방전 열흘 만에 [[일본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식량도 다 떨어졌다. 일본군은 이제 영국군의 수송기가 뿌리는 보급 [[낙하산]]이 자기네들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보급이 사실상 사라진 일본군은 이것을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러나 처칠 급여의 양 자체가 사단급의 인원에게 충분하지 않았고, 연합군도 바보가 아닌지라 눈에 불을 켜고 보급품을 주우려는 일본군을 찾아다녔으며, 아예 적당한 위치에 떨어진 보급품 주변에 숨어 기다리며 [[저격]] 등으로 인간낚시를 시도하는 경우들도 많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보급품이 모자라니 저런 상황이 예상되더라도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주워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며, 심지어 저격이 들어오는 와중에 처음부터 일정 숫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러시안 룰렛]]처럼 여러 명이 동시에 달려나가 주워와야 하기도 했다. 더욱 불쌍한 것은 병사들을 갈아넣어가며 처칠 급여를 어찌어찌 확보한다 해도 식량, 탄약, 무기, 의료품이 아닌 연합군 모자나 피복, 텐트 등이 상자 안에 가득해서 일본군 병사들이 좌절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적성 군복을 그대로 입었다간 아군오사 가능성이 높아진다. 텐트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1991-1992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묘사된다.] 더구나 일본군 병사 상당수가 학력이 낮거니와, 일본 정부가 [[귀축영미]]를 주장하며 외국어 교육을 금지한 것 때문에 영어를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 많아 라벨을 읽어보고 선별해 주워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 일본 학제상 외국어 교육을 받으려면 최소 중졸은 되어야 했다. 문제는 일본군의 중추는 농촌 출신의 소졸자들이었다는 것. 자유주의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은 도시 출신, 상공업 종사자, 고학력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물론 읽을 수 있었더라도 총알이 빗발치는데 선별할 시간이 있었을 리가 없다. 결국 굶주림과 [[백병전]]으로 미야자키 부대는 전멸해버린 중대가 셋이나 있었다. 미야자키 부대의 병력은 5월이 되자 원래의 4분의 1로 감소한 형편이었고, 사토 사단장은 미야자키 부대에게 자살 돌격을 금지하고 방어 태세로 들어라가고 명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